게임작업의 방향성에 관해

Philosophical Game Design
Lars Koznack

from “The Video Game Theory Reader 2”

이 아티클을 읽으면서 게임을 만드는 일에 대한 나름의 입장을 정리해 보았다.
내가 현실 이슈를 게임으로 만드는데 흥미를 가진 것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교화를 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다. 단지 말그대로 흥미로왔기 때문이다.

그런 방향을 생각만 하고 있다가 프라스카의 September 12th 같은 게임을 보고 실재로 가능 할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매우 반가웠다. 어떻게 플레이 해도 실패 할수 밖에 없는 게임이지만 결국 폭력으로 폭력을 막는 다는 방법의 논리적 결함을 드러낸 그 게임은 충분히 흥미로왔고 그렇기에 훌륭한 게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떻게 해도 테러리스트의 증가를 막을 수 없는 닫힌 플레이 구조하에서는 결국 반복플레이가 의미가 없어지기에, 한번 플레이 하고난 후에는 흥미가 떨어지는 문제가 있었다. 한마디로 ‘답정너’인 셈이다.

다시 말하지만 내가 현실이슈로 게임을 만드는 것은 교화의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다. 단지 ‘그게 더 흥미롭기 때문’이다. 그렇다. 마법과 기사를 가지고 만든 게임 보다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에 관한 사람들에 관한 게임을 만드는 것이 단연 더 흥미롭다.

그렇기에, 그러한 방향의 게임을 만들면서 어떤 수사법을 택해야 가장 흥미로울수 있는 가에 대해 고민해 보았고, 그 결과 ‘상황 자체에 몰입하다’ 라는 기본적 자세를 얻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슈를 보는 바람직한 시각을 설파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가지고 놀수 있는 도구를 선사하는 것이 가능하리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놀다’라는 말은 공간적 여유를 두었기에 내용물이 흔들리는 상황을 말한다. 어릴적엔 그런 식으로 ‘놀다’라는 말을 많이 썼었는데 그게 경상도에서만 그랬던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손잡이가 논다. 나사좀 꽉 조여라.’ 같은 표현으로 쓰였는데 요즘은 흔히 보기 힘든듯 하다. 나한테 놀이란 이렇듯 사회적 상황속에서 자리를 잡지 못한 구성원들이 서로 흔들리며 달그락 거리는 모습을 뜻한다. 그래서 흔들리며 달그락 거리는 소리를 내는 장난감을 만들뿐 그 내용물이 어디에 가서 붙었을때 이빨이 맞는가에 대한 문제는 놀이의 역할이 아니다. 내가 집중할수 있는 것은 어딘가 놀이가 벌어질수 있는 구석을 찾고 그것을 놀이로 실체화 시키는 일이다. 나중엔 변할지 몰라도 지금은 그렇다.

왜냐? 목적이 프로파간다가 아니라 ‘흥미’이기 때문이다. 나는 훌륭한 사회참여적 게임들이나 교육용 게임. 그러니까 보통 ‘시리어스 게임’이라고 불리는 게임들을 플레이 해보고 한가지 불만이 있었는데 그 어떤 시리어스 게임도 일반적인 소비자의 눈높이에 맞출수 있을만한 재미의 수준을 갖추지 못했다는 점이다. 어히려 순수 유희를 꿈꾸는 게임 안에서 심즈나 문명 처럼 플레이어에게 지적 자극을 주는 경우가 더 많았다. 나는 왜 그런지 궁금했다. 왜 시리어스 게임들은 재미가 없을까. 혹시 시리어스 게임이란 기능성이 있다는 의미가 아니고 재미없다는 의미의 분류법이었던 걸까? 나는 그러한 궁금증에서 사명을 시리어스한 소재에서 자발적이고 지속가능한 놀이를 찾아 내는 것으로 정했다. 설마 순수한 재미를 위해 모든 에너지를 쏟는 분들만큼 재미를 줄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이전과는 다른 접근법을 취한다는데 의미를 둔다. 이익이 아닌 재미를 추구하는 시리어스 게임.

물론 흥미에는 이슈 자체에 대한 흥미와 이슈를 가지고 노는 행위에 대한 흥미가 있다. 어쩌면 하나의 이슈에 대해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끼리도 놀이라는 속성안에서 교집합이 생길 수도 있다. 그것이 진정 재미있는 부분이다.

구멍이 두개 뚫린 파이프에 작은 돌맹이를 넣고 흔들면서 어떤이는 윗쪽 구멍에 돌맹이가 들어가길 바라고 어떤이는 아랫쪽 구멍에 들어가기를 바랄 수 있다. 그 둘의 공통점은 돌맹이가 노는 파이프를 흔든다는 점이다.

가끔 소크라테스의 문답대화를 읽고 있으면 나는 그가 진정 답을 정해놓고 상대를 몰아가는 것인가? 아니면 진심으로 상대의 생각을 궁금해 하는 것인가를 헷갈릴때가 많다. 나는 후자가 그의 방법론에 진정성을 부여한다고 생각한다. 그 처럼 나는 어떤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나 조건, 물건, 환경들을 게임의 규칙에 따라 배치하고 플레이하면서 나타나는 과정이 궁금할 뿐 캐릭터나 상황과 같은 요소들에 대해서 판단하거나 점수를 매기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렇게 하는 것은 흥미롭지 않다.

실험과 모색의 장으로써의 시뮬레이션 게임은 두가지 이유에서 꺼려진다. 첫번째는 그런 게임들이 가진 실험과 모색이 단지 프로파간다를 윤색하는 역할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고 느꼈기 때문이고, 두번째는 안타깝게도 그런 시뮬레이터를 만들수 있는 실력이 아직 없기 때문이다.

Philosophical Gamedesign이라는 이 아티클에는 의도적으로 틀린 철학에 기반한 게임메카니즘을 만들어 플레이어의 흥미를 유지하고 동시에 프로파간다가 아니라 상상력을 자극하는 방식이 가진 설득력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앞의 두 가지 단계보다는 훨씬 흥미롭다는 점에서 훨씬 훌륭하다. 한마디로 플레이 할만한 가치가 있어 보인다는 것이다. 나의 방향성과 일부 겹치는 지점도 있다. 하지만, 좀 더 근본적으로는 ‘틀린 철학’을 이용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 방식에 ‘틀린 철학’이라 명명된 요소를 도입한 순간 이미 피아 구분이 일어나고 풍자적 자유도도 훼손된다. 결국 ‘더 교활해진 답정너’가 아닌가?

틀린 철학을 통해서 흥미를 유지하고 상상력을 자극한다면 왜 단지 흥미를 유지하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게임을 만들고 틀린 철학이 우연히 발생할 수 있는 여지를 주지는 않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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